실험기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 262
aerodynamics
2010. 11. 23. 22:08
독일의 메사슈미트 Me-262는 1944년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로서 실전에 사용되었던 2차세계 대전 최강의 최첨단 전투기이다.
P-51 무스탕이나 스핏파이어, 야크 Yak-9등의 동시대 왕복엔진 전투기보다 빠른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같은 제트 전투기였던 영국의 글로스터 미티어보다도 더 빠르고 강했다. 당시 항공기에는 당연히 달려있어야 하는 프로펠러가 없는 신비의 전투기이기도하다. 현대전은 항공전자의 능력이 전투기의 성능이지만 당시의 전투기의 고도와 속도를 이용한 에너지 전투였다. 그래서 낮은 속도의 기동성 보다는 고속의, 높은 고도를 차지하는 제트 전투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 최초의 제트 전투기 Gloster Meteor 1943년에 첫 비행을, 1944년 7월에 작전에 투입되었다.>
절벽 끝에서 탄생한 제트 전투기
하지만 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두고 그 탄생은 너무나 늦어 운영기간은 1년도 채 못되었다. 1944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고 독일 동부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이후 패배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독일의 전략거점을 폭격하기 위해 매일 영국에서 수 십, 수 백 대의 폭격기가 날아들고 있음에도 그를 요격하기 위한 독일측 요격기들은 고작 수 십 대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 최강의 전투기가 있어도 그것을 생산할 여력도, 운용할 인력도, 유지할 자원도 없었다.
독일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때 이 전투기가 태어난 것이다. 지아무리 우수한 전투기라해도 현재의 장거리 미사일이 없는 이상, 당시 몽둥이들고 싸우던 시기로 본다면 Me 262 몇대가 열배 이상의 연합군 전투기를 감당해 내기는 불가능하였다. 그렇게 우수했던 제트엔진의 시작을 열었던 항공사의 큰 도약은 패배한 전투기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차대전후 소련, 미국 등에서 제트엔진을 이어가는 전투기를 개발하면서 불과 5년 뒤 한국전쟁에서 제트 전투기의 첫 공중전이 벌어지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독일 본토 폭격을 하고있는 B-17 폭격기를 요격하고있는 Me262 삽화>
제트 전투기의 패배 원인
메사슈미트 Me-262를 괴롭혔던 것은 파일럿의 부족이었다. 사실상 생산대수야 어떻게든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기존의 왕복 전투기 생산라인을 폐쇄하고 Me262만을 집중할수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일럿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프로펠러 전투기에 비해 최소 시속 200킬로미터 이상 빠른 전투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프로펠러기를 조종하는 파일럿보다 몇 개월의 추가적인 적응이 필요했다. 심지어 많은 독일의 조종사들은 제트 전투기에 대한 신뢰가 낮아 우수한 파일럿의 지원율도 낮았다.
여기에는 제트 엔진의 성능에도 문제가있었다. 고도, 속도를 달성하는데는 우수했지만 고장율이 높아, 출격중 임무를 포기하는 사례도 빈번하였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1,430대의 Me 262가 생산되었으나, 연합군에 대항해 싸운 것은 300대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보아도 이를 입증한다.
<Me262의 제트엔진인 BMW 003. 축류형 엔진을 사용하여 원심류협 압축기를 사용하는 영국의 미티어글로스터 보다 직경이 작았다>
독일의 전략도 Me262의 패배 원인을 키웠다. 1941년 4월에 시험비행에 성공한 Me262를 1944년 9월에서야 생산에 착수하였다. 그동안 엔진개발등의 문제가 있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독일은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이제껏 운용해오던 프로펠러기의 편한 조종의 타성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프로펠러기를 고집하면서 결국 BF 109 전투기를 주력으로 생산을 계속하게되었고, 제트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공군의 에이스였던 아돌프 갈란테는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에게 제트 전투기로의 주력기종 변경을 건의하였지만 묵살당하고말았다.
<BF109 독일의 주력 전투기>
독일은 이 우수한 전투기를 전투기보다는 영국 폭격에 사용할 폭격기로 구상하였다. 당시로는 영국본토 공격이 방어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정책적 판단이 Me262의 실전 투입을 늦게한 원인이되었다. 결국 전투 경험도 별루 없는 초보 파일럿들만으로 구성된 Me262 대대는 아무리 첨단의 Me262라해도 그 전력이 살아날수가 없었다. 사람이던, 기계던 때를 잘만나야하는 것이다.
<형상이 마치 상어몸통 같다>
개발과정
1939년 6월 7일, 멧서슈미트사로부터 P1065 계획이 입안되어 그 설계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예정되어 있던 BMW003 제트 기관이 개발중에 크기가 대형화되면서, 그대로 기체에 달면 무게중심이 변경되어야만 했다. 그 해결책으로서 주 날개를 후방으로 18.5도 후퇴각을 만들었다. Me262는 본래 후퇴익기로서 설계되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 작은 후퇴각은 후퇴익 효과를 얻는 데는 불충분하고, 무게중심 해결에만 도움이 되었다.
<Me262의 후퇴각은 당시 후퇴각의 장점을 알고 설계한 것은 아니다. 후퇴각은 천음속에서 음속돌파에 유리하다>
1941년 4월 18일에 시제품 1호기는 첫 번째 비행에 성공했지만, 당시 BMW 003 기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부득이 융커스 Jumo 210 G 왕복기관을 기수에 장착해 기체를 시험했다. 조종성은 매우 좋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BMW003 기관이 탑재된 후에도, 안전상의 이유로 기수의 Jumo 210 G기관은 그대로 남았다.
1942년 3월 25일에 BMW 003을 장착한 Me-262기가 처음으로 비행했을 때 기관이 2개 모두 정지해 기수의 Jumo 210 G만으로 무사히 착륙했다. BMW 003은 신뢰성이 낮아 융커스사의 Jumo 004 제트 기관으로 교체되었다.
1942년 7월 18일에 독일 남부의 군츠부르크 지구 라이프하임 공군 기지에서 프리츠 벤델의 조종에 의해 제트 기관만으로의 첫비행에 성공해, 제트기로서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시험 비행은 계속되어 1942년 중에 기체의 개량은 완료되었지만, Jumo 004 기관은 여전히 불안정해, 양산에는 시간이 걸렸다.
<기수에 Jumo 210 G 왕복엔진을 장착한 Me262. 매우 드문사진중 하나다>
1943년이 되면서, 시제품 4호기가 공군 수뇌부에게 알려져 1943년 5월 22일에 아돌프 갈란트 중장이 시승했다. 갈란트는 이것을 극찬하여 프로펠러기에서 제트기로의 전환을 지시했다. 1943년 7월 25일에는 항공사령관 헤르만 괴링 원수 앞에서 시범 비행했다. 한층 더 전륜식 착륙 장치를 유압인입식으로 개량한 시제품 6호기가, 히틀러에게 알려졌다.
1943년 11월 26일, 히틀러 앞에서 Me-262의 시험 비행을 했다. 그 비행을 보고 히틀러는 감격해, Me-262를 고속 폭격기로 생산하도록 명해 참여하고 있던 괴링과 갈란트를 놀라게 했다. 히틀러는 대규모 폭격으로 독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던 연합국에 대한 보복과 유럽 대륙에의 침공을 준비하여 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Me-262는 원래 전투기로서 설계되어 그것을 폭격기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관계자는 폭격용의 Me-262 생산에 소극적이었다. 한층 더 연합군의 공습이 격화되어, 기관이 양산되는 1944년까지 폭격용 Me-262의 생산을 개시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하여 1944년 5월 23일의 회의에서 Me-262를 전투기라고 부르는 일을 금지하고, 갈란트는 파면되었다가 1945년 2월에 갈란트는 Me-262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성능의 문제
초기의 제트 기관의 문제는 저속시의 추진력이 약한 것이었다. 급가속하기 위해서, 스로틀을 열어 필요 이상으로 연료를 연소시키면, 고온의 열로 연소실을 녹여 기관이 고장나곤 했다. 기관의 수명은 최대 70시간이었고 평균 25~30시간이었다고 한다. (현대 항공기는 2000시간 이상) 다른 한쪽 또는 양쪽 기관이 모두 고장나, 전투로부터 이탈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본래의 성능을 내기 위해서는, 전투지역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충분한 속도에 이르러 있어야 했다. 고도를 올리는 데에 매우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상승하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착륙은 어려웠다. 활주로에 접근 중,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도 스로틀의 반응이 늦어 재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다. 연합군 조종사는 이 약점을 간파해 착륙 시에 공격했다. 게다가 당시의 프로펠러기와 비교해서 대량의 연료를 소비했다. 불과 30분 정도의 작전에서도 연료탱크를 가득 채워야 했다. Me-262는, 기체 내 앞부분과 후부에 주 연료탱크와 보조 연료탱크가 있어, 연료 탑재 용량은 합계 2,570 리터로 비교적 많았다. 게다가 기체 밖 앞부분에 300리터 연료탱크를 2개 탑재할 수 있었다. 항속거리는 고도 6,000 m ~ 9,000 m 였고, 속도는 850 km ~ 1,050 km 였다.
< 동체전방에 항속거리 연장을 위한 300리터 들이의 외부 연료 탱크를 장착하였다. 전방의 안테나는 레이더 안테나로 야간임무가 가능하였고, 2인승에 후방석은 레이더 조작사가 탑승하였다>
실전에서의 사용
처음에는, 독일 공군의 정예 조종사만이 탑승이 허락되었다. 전투에 있어서의 전제로서 공중전에서 하는 선회를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선회하면, 기체가 무겁기 때문에 빠르게 속도 에너지를 상실하기 때문이었다. 저속으로부터의 가속력이 낮은 Me-262는 한 번 실속해 버리면 전투 중에 실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속도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숙련된 조종사는 속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일 없이 완만하게 선회해, 폭격기의 편대를 추월해서 공격했다. Me-262의 특성을 이해한 독일 조종사는 연합군의 폭격기를 호위하고 있는 전투기를 처음부터 상대도 하지 않고, 폭격기들만을 일방적으로 격추할 수가 있었다.
<Me262는 전투기와 같이 급기동을 피하면서 주로 폭격기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어 숙련된 조종사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미숙한 조종사들도 탑승하게 되었다. 그들은 연합군의 조종사들에 의해서 선회전으로 끌여들여져 간단하게 격추되었다. 전쟁 말기가 되면서, 비행할 수 있는 기체의 수도 매우 적어졌다. 비록 있었다고 해도, 압도적인 연합군기의 수에 비하면, 전쟁의 추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1945년 3월 18일, 37대의 Me-262가 연합군측의 1221대의 폭격기와 그것을 호위 하는 632대의 전투기로 구성된 대폭격기대를 공격했다. 그 결과, 12대의 폭격기와 1대의 전투기를 격추했지만, Me262 자신들도 3기를 잃었다. 이 4대 1이라고 하는 격추율은 독일 공군이 꿈에 그리던 숫자와 같았지만, 연합군으로서는 전체의 1% 정도의 손해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고장으로 추락한 Me-262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연합군 조종사 증언
"우리가 262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것은 44년 10월이었다. 그것은 제트기이며, 가장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것과 만나면 어떨까하는 것이 약간 불길하기는 했어도,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진...... 우리는 전쟁에 이기고 있었고, 대항해 오는 조종사들은 어린 아이들에 불과했으니.... 단 서부전선에 모든 에이스들을 모아 놓은 갈란트의 비행대대는 예외였다. 그래도 처음 262를 보았을때 내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Me 262는 그저 점으로 보이다가, 갑자기 그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다. 접근속도가 눈깜짝할 새였다. 우리는 262에 대해 아무런 대비책을 들은 바가 없었으며, 그저 " 그놈들을 조심하라"는 말뿐이었다.
대규모 공습이 그들의 공장, 정유소, 연료를 날려버리기 전에 갈란트의 주장대로 독일이 Me 262를 공격무기가 아닌 방어 무기로 사용했다면, 전쟁은 우리가 이겼을 것이지만,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미공군 제임스 피네건 대위
파생형
<일본의 키카. 1945년 독일 ME262 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카피형태 일본이 독일로 잠수함을 보내어 받아온 설계도록 제작한 키카 전투기이다. 마찬가지로 비행도 하지 못하고 그냥 전쟁을 마치게된다>
<2차대전 후 독일 ME262 슈바르베전투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체코의 Avia CS-92 전투기>
<러시아의 Su-9>
기타사진
<Me262의 공중 비행 사진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이 전후에 지상에서 찍힌 사진이다.>
<Me 262로 대지 공격임무도 주어졌다. 대형 폭탄을 장착하기위한 준비를 하고있다>
<이사진의 내용은 알수없지만 농기구 트랙터로 비행장이 아닌 밭 같은 곳에서 비행기를 끌어내고있다. 아마도 2차대전 종전후 이리 저리 흩어져있던 Me262를 연합군이 수거하는 듯하다>
<지하 격납고에 제작중인 Me262를 연합군 측이 확인하고있다>
<전쟁 후 아우토반 고속도로에서 발견된 Me262 아마도 아우토반에서도 이륙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Me 262 A-1a/U4 로 폭격기를 한방에 격추 시키기위해 50mm 기관포를 장착하였다. 단 두대만 시험용으로 제작되었다. 영국군이 점령후 기체를 검사하고있다>
<전쟁중 기체고장으로 프랑스에 불시착한 Me262>
<이 기체는 1946년 8월 오하이오주에 추락하였다. 실제 이기체는 1945년 3월 독일의 시험비행 조종사가 탑승하여 비행하다가 비행기 고장으로 프랑크푸르트 연합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하여 가장 처음으로 연합군측에 넘어온 기체였다>
인원 1
길이 10.60m
날개길이 12.60m
높이 3.50m
날개면적 21.7 제곱m
무게 무장적재전 4404kg
무장적재후 7130kg
최고속도 900km/n
항속거리 1050km
상승고도 11450m
무장 30mm MK 108 기관포 4문
55mm R4M 로켓 24발
250kg 폭탄 2발 또는 500kg 폭탄 1발 적재
제작년도 1944년 3월
총 생산댓수 1430 대
Me 262의 복원
세계 최초의 전트 전투기는 독일의 EMDS사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2006년 베를린 에어쇼에서부터 비행을 시작하였다.
EMDS사는 Me262뿐만아니라 Junkers Ju52, Messerschmitt Me 109, Junkers Ju52등을 복원시켜 비행하였다.